인면 : 이호욱 20191004 > 20191016


얼굴을 오랫동안 그렸다. 아마 수묵으로 처음 얼굴을 그린 것이 대학에 들어가 과제전을 준비하던 때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 뒤로 전시가 있을 때마다 얼굴을 계속 그렸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얼굴을 그릴 땐 표정이 우선 재미있어야 하는데, 사람의 표정에는 흔히 지나온 삶의 여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들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남의 표정을 그렸지, 누가 나의 표정을 그려준 적이 딱히 없다. 우선 주변의 그림을 그리는 이들 중에 인물화를 전공으로 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고, 나의 표정을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인물화를 그린다 하더라도 즉흥적인 감정과 화흥으로 표정을 포착하여 그리기보다 사진을 참고하여 밀도 높은 묘사력으로 오래 그리는 이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난 얼굴의 표정을 그리는 게 재미있었고 그 이유가 꼭 동양화를 전공해서라기보다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맛을 보여주는 수묵과 화선지란 재료에 매력을 느껴 그것으로 한동안 많이 그리지 않았나 싶다. 


하도를 그리지 않고 오로지 흰 화선지에 머릿속으로 구상한 장면을 먹의 다양한 형상으로 펼쳐 보이는 기법을 감필법(減筆法)이라고 한다. 회화를 제작하는 화가의 의도를 작화의 정해진 순서대로 짐작할 수 있다기보다는 대상의 순간적인 인상을 읽어내어 그리는 것에 특화된 기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 본인은 이런 기법의 특성을 참고하여 다양한 인물들의 인상과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이를 수묵화로 제작하여 이를 모아 서민들의 개별적이고 익명에 의한 인상을 대중의 포괄적 장면으로 묶어 완성하고자 하였다. 먹으로 그린 인물의 형상은 세필로 그린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전신의 이론에 기초하여 인물의 검버섯이나 주름의 완전한 묘사를 추구하던 조선 후기의 초상화와는 달리 본인이 생각한 인물화의 주목적과 표현 상은 대상을 마주하고 그릴 때 짐작하는 대상의 성격과 본인이 그릴 때 느끼는 감정이었고, 대상과 비슷하게 터럭 하나라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자세가 아닌 인물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감정들을 먹의 다변적인 재료의 성격을 응용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는 본인의 주제의식과 제작 시의 감정, 그리고 대상을 통시적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제일 중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리는 대상을 바라보고 본인이 마음속으로 마주하여 느끼는 감흥과 감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묵과 모필의 변칙적인 적용이 가능한 감필묘로 그림을 그린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그리고 싶은 대로 붓을 놀리면 되었고, 원하든 원치 않든 전과 전혀 다른 형상들이 화면 위에 나타났다. 


오랫동안 인물의 표정을 그리며 느낀 것은,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고 메말라간다는 것이다. 이는 나이와 세월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고단한 세상을 살며 올라온 감정들이 쉬이 소화되지 못하는 까닭도 있을 터인데,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심히 걱정되는 것은 오늘날의 인면에는 과거에 비해 고민과 불안, 불신, 걱정, 공격적인 언사, 증오와도 같이 서로와 서로를 파괴하는 슬픈 감정들의 농도가 갈수록 짙어진다는 사실이다. 누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또 누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조롱하며 비웃고 모멸하고 멸시하며 이유없이 저주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얼굴이자 우울한 자화상이다. 세상의 밝은 사람들을 찾아 그리고 싶어도 나의 주변과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인면의 풍경을 오래 그린 수묵화의 형식을 빌어 조용히 몇 장 담아보았다.

by gallerygrida | 2019/10/02 14:28 | 2019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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